2006년 02월 09일
히미코가 내게 가르쳐 준 것
뭐야. 모두 이성애자 얘기잖아. 일전에 로맨스 타령을 할 때에 좋아하는 로맨스의 줄을 세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베스트로 꼽았던 영화들은 모두 남녀 한 쌍(일대다의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의 사랑 얘기. 대상을 2005년의 영화로 한정시키다 보니 그 중 빼어난 게이/레즈비언 로맨스를 만나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영화들의 명단을 늘어놓고 나니 어쩐지 편협한 이성애자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저리기인가.
<메종 드 히미코>를 조금 일찍 보았다면 리스트의 구성은 달라졌을 것이다. 감독 이누도 잇신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그랬듯,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질척거리지 않는 법을 안다. <조제...>가 장애인을 대할 때 그러했듯 또 다른 소수자, 게이들에 대해서도 값싼 연민 따위는 섞지 않는다. 게다가 프릴셔츠와 쫄바지를 곱게 차려입은 오다기리 조라니, 그야말로 마성의 게이가 아닌가. 게이 할배들 다수를 여성화시키고 트렌스젠더와 게이를 뒤섞어 놓은 묘사에 대해서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히미코의 등장은 모든 말을 잃게 했다. 그토록 야단스럽게 차려입고 다니면서도(세상에 그 가운과 머릿수건은 어디서 구한거지?!) 우아하게 주변을 압도하는 힘이라니.
히미코와 그의 친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전 세대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생명의 위협과 세상으로부터의 축출을 감당해야 했던, 이전세대 소수자들의 지난한 삶과 달리 <메종 드 히미코>의 인물들은 나른하다. 주변의 호모포비아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들의 공격성은 관습적인 수준. 게이 할배들도 열렬히 저항하며 메시지를 던지려는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도 각자의 고뇌가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파도 소리 철썩이는 아름다운 해변가, 외롭고 애조띤 모습들이다. 이누도 잇신 특유의, 이른바 '쿨한' 묘사가 한몫 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머리에 띠 두르고 궐기하기보다 현재를 누리는 여유로운 태도는 이누도 잇신만의 것은 아니다. 얼마 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 나는 영화가 소수자를 대하는 점차 정교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벽장을 열고 나오는 선언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건 오래된 일이지만, 정치적 공정성을 가장한 쿨한 척 태도나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눈물빼는 호소에서 훌쩍 벗어나, 영화가 그들을 관장하는 방식은 바로 얼마 전과 또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We are the world"를 외치는 영화보다 각자의 특수성을 날카롭게 선언하는 쪽을 더 좋아하지만, 정교한 스토리텔링은 언제든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행과 나는 서로의 호모포비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이성애자로 살면서 호모포비아를 인식할 틈이 없었던 건 영화가 끼친 영향이 크다. 월드와이드웹도 블로그도 구글도 없던 옛날, 퍽이나 폐쇄적이었던 내 십대에 타문화와 접하는 기회는 그저 영화였다. '퀴어'라는 단어도 모르던 때에 '퀴어 영화'라는 용어를 처음 익힌 건 당시에 경전으로 삼던 <키노>. 데릭 저먼이나 그렉 아라키, 파스빈더를 찾아 보게 만든 건 그 시절의 지적 허영심이었을 테지만 그 때만큼 영화 앞에서 경건했던 때는 다시 없었다. 그 때에 영화는 영화였을 뿐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창이었고 정치를 가르치는 스승이었으며 타문화를 안내하는 전도사, 모든 것의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영화가 없었다면 호모포비아에 푹 젖어 있을런지, 수퍼 우먼이나 마초 여성의 탈을 쓰고 살았을지 누가 알려나. 마이클 윈터바텀 덕분에 사라예보를 알았고, 켄 로치 덕분에 계급을 생각했으며 영화가 알려준 수많은 음악- 이를테면 <굿 윌 헌팅>의 엘리엇 스미스, <그녀에게>의 피나 바우쉬, 왕가위의 피아졸라, 우디 알렌의 재즈들, 비스콘티의 말러 등- 을 통해 음악을 잊지 않게 됐다. 지금도 나는 얄팍하지만, 영화가 포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더 얄팍한 인간이 되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메종 드 히미코>를 다시 보면서 그 시절, 영화가 타자와의 소통을 터 주었던, 영화 외에는 다른 길을 몰랐던 그 때를 잠시 생각했다. 너무 많은 정보와 관점이 넘쳐나는 지금, 어느 새 영화에서 구하는 것은 더 이상 '소통'이 아니게 되었지만 아직도 영화는 소통의 순간을 만들고 있다. 여러 소수자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게이 로맨스는 (레즈비언 로맨스와 또 달리) 내게 가장 타자의 이야기였고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러할 테지만, 그들 영화가 어느 새 이렇듯 여유로워진 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직도 증오 범죄가 들끓는 사회이니 현실이 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거듭하면서 영화는 자신의 화법을 발전시켜 왔고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도 더 많은 생각의 기회를 준다. 영화가 내게 가르쳐 준 바는 타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법이면서 또한 나 자신의 타자성을 생각하는 법. 잠시 그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다행히도 영화는 여전히 많다.
# by | 2006/02/09 03:51 | 두런두런 영화 | 트랙백(4)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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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어떤 계기가 되면 언제든 디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이니까요.
비공개/ 알아, 그래서 쓴 것도 있단다.
청포도님/ 사실 저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성적 취향이 아니더라도,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설령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공존하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죠.
guss님/ 감사합니다.